[한국뉴스통신=칼럼] 이덕균 =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캐나다 상품 불매 운동에 참여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캐나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캐나다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는지 궁금했다.

캐나다 동북부 래브라도 반도와 뉴펀들랜드 지역에서는 11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를 물개 포획기간으로 정하고, 물개 사냥꾼들이 몰려와 물개를 마구잡이로 때려잡는다고 한다. 캐나다 정부는 물개사냥을 향후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경제 활동 수단으로 규정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인해 이 곳에서는 2009년도에만 286,238마리를 도살했는데 그 중 태어 난지 12일에서 12주 밖에 안 되는 어린 물개가 96.6%나 되었다고 한다. 이 귀여운 동물들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은 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허영심에 눈 먼 구매자에게 모피로 제공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인터넷 사진으로 보면 너무나 끔찍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단지 캐나다에서만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매체를 통해서 동물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다. 먹기 위해, 입기 위해, 실험 대상으로 쓰기 위해, 인간들의 즐거움과 취미생활을 위해 동물들의 생명이 마구 다루어지고 있다.

꽤 오래전에 KBS의 ‘한민족 리포터’에서 박미연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에 대해 방송이 된 적이 있다. 그녀는 1996년, 미국의 초대형도살장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다리가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던져지고 의식이 또렷한 채 도살당하는 돼지들을 본 것이다.

그 후 그녀는 동물권익단체 COK(Compassion Over Killing : 도살에도 자비를)의 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2002년 미국의 한 뉴스 채널에서 COK에서 촬영한 영상이 방송되었다. 그녀와 COK 회원들이 80만 마리가 사육되는 미국의 가장 큰 양계장에 몰래 잠입하여 촬영한 것이다. 이 사건을 일명 ‘양계장 습격 사건’이라고 불렀다

방송된 내용들은 닭들의 부리가 잘려진 채 털이 한 움큼씩 빠져있거나, 피부질환으로 괴로워하는 모습과 죽음 직전에 이른 8마리의 닭을 구출하는 장면이었다. 이것이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내가 읽었던 ‘죽음의 밥상’이란 책에서 Virgil Butler(버질 버틀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는 아칸소 주 그래니스에 있는 타이슨푸드 사 도살장에서 일을 하며, 매일 밤마다 8만 마리 의 닭을 죽여 왔다고 한다. 버틀러는 도살되는 닭의 셋 중 하나 꼴로 살아서 끓는 물탱크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닭들이 ‘산 채로 튀겨지면서… 퍼덕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치고, 눈알이 문자 그대로 머리에서 튀어나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꺼내 보면 그런 닭들은 ‘뼈가 아스러지고, 몸의 부위가 군데군데 없어져있다’고 한다.

기계가 오작동을 해도, 라인이 멈추지 않아서 닭들이 하나같이 산 채로 끓는 물속에 들어가거나 말거나, 목 절단 기계가 목이 아니라 닭의 다리를 자르거나 말거나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게 도살된 닭들의 대부분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도 춘천의 한 돼지 육가공 회사에 다녔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돼지를 농가에서 수매하여 돼지 도살장에 넘겨주고, 그 도살된 고기를 회사로 가져와 가공해서 납품하는 일을 하였다. 그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동기는 돼지들이 줄지어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역시 가축에 대한 배려보다는 수익성을 더 우선시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박미연씨는 ‘백인사회에서의 인종차별과 식용가축에 대한 학대는 다르지 않다고’강변한다. 그녀가 미국인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우리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였다. 아무리 식용가축이라 해도 도살되기 전에 의식을 잃게 해야 하고, 최소한의 사육환경은 갖추라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였다.

지금도 가난한 많은 국가에서는 살기위해 먹는다. 허지만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난 우리는 이제 즐기기 위해 먹는다. 즉 인간의 먹는 즐거움을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사육되어 도살되고 있다. 눈앞에 진열되어 있는 고기들을 볼 때, 마치 과일과 채소를 골라 바구니에 담듯이, 하나의 잘 익은 좋은 식품으로만 보인다. 그리고 그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니겠는가? 생명을 끊는 일에 있어서 최소한 ‘도살에도 자비를’베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입에 즐거움을 위해 그 대상이 비참하게 길러져서,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식용이라는 이유로 처참한 생을 살다 마감하는 식용가축에 대해 관심과 자비를 베푼다면, 내 이웃의 고통에 대해 지금처럼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동물에 대한 동정심과 사랑이 되살아난다면, 그 동정심은 더 나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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